직업성 암, 환경성 암 예방에 진척이 없는 이유
메사추세츠 로웰대학 환경보건학 연구소의 크리벨(Kriebel) 박사는 노동현장과 일반환경에서는 각종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노출될 수 있음에도, 국가적으로 화학물질로 인한 암을 예방하는 데 전혀 진척이 이루어지지 않는 주요 이유를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꼽았다.
1) 암의 1차 예방에 충분한 기금이 투입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암연구소(National Cancer Institute)에서는 전체 예산의 10% 미만이 예방과 관련된 연구에 투입되는데, 이러한 예산의 대부분도 1차 예방이 아닌 암의 조기진단과 같은 2차 예방 연구에 쓰인다.
2) 실제 노동현장이나 일반환경에서는 여러 가지 발암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될 수 있음에도, 발암성을 평가하는 기존 연구에서는 한 번에 한 가지 물질만 위험도를 평가하는 방식(one-chemical-at-a-time risk assessment)으로 진행된다. 그러다보니, 기업에 의해서 쉽게 반박당할 수 있고(예를 들어, 기업이 생산하거나 취급하는 발암물질 외에 기타 다른 발암물질이 원인이 되어 암이 생길 수 있으므로 추가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다거나,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식으로 반박당할 수 있음), 발암성 평가작업이 화학물질의 생산과 적용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3) 일단 발암성이 확인되었을 때, (물질의 대체, 완전밀폐와 자동화 등) 제품이나 생산공정을 전면적으로 재디자인 함으로써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는 노력대신에, 부분적인 효과만을 볼 수 있는 공학적 개선을 통해 노출을 줄이는 전략을 채택했다는 점이다(예를 들어, 국소배기를 설치한다고 해도, 배기장치 고장, 청소나 수리작업 등 발암물질에 노출될 수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은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암을 예방하려면 첫째, 사전 예방 원칙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 둘째, 지속가능한 방식으로의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재디자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패러다임을 바꾸자.
1) 사전예방의 원칙
사전예방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 1989년 리오 선언에서 처음 언급되어, 1992년 UN 환경위원회에서도 인용되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기관이나 국제회의에서도 인용된 바 있다. 이는 어떤 활동(물질이나 인자, 생산활동, 만들어진 제품 등)이 인간의 건강과 환경에 대한 위험을 증가시킬 때, 비록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다고 해도 사전예방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원칙의 핵심적인 요소는 4가지이다.
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예방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나. 입증책임은 원인제공자에게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 유해한 활동이나 요인들을 대체할 수 있는 폭넓은 대안들을 마련해야 한다.
라. 의사결정과정에서 공공의 참여가 확대되어야 한다.
2) 지속가능한 생산(Sustainable Production)→지속가능한 발전→지속가능한 사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를 생산하는 방식에 있어서 유해물질을 취급, 사용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그 부담이 돌아가게 된다. 석면이 함유된 탈크가 베이비파우더에 사용되어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현 시기 한국사회는 결코 지속가능한 사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생산은 사회를 발전시키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생산은 수 세대밖에는 지속될 수 없으며, 그러한 사회의 미래는 없다. 효과적으로 암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발암물질들을 노동현장, 일반환경, 가정에서 제거해야 한다. 가장 좋은 길은 청정기술을 이용해 경제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유해한 화학물질과 기술을 사용하는 현재의 생산과 소비시스템을 재디자인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속가능한 생산이며,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대안이다.
3. 원칙을 고수하려는 외국의 정책적 노력
예 1) 미국 메사추세츠의 독성물질사용저감법(Toxics Use Reduction Act, TURA)은 이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1989년 주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법은 보다 안전한 대체물질의 사용을 촉진하고, 기업주들에게 매년 유해물질의 사용량을 보고하도록 하고 있으며, 대량 사용 시에는 매년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고 있다. 이 법은 직접적으로 물질의 사용을 규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주로 하여금 유해물질의 사용현황과, 향후 이러한 유해물질을 어떤 방식으로 제거(금지, 대체)할 것인지를 문서화된 계획으로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기업주들은 계획을 반드시 이행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법 시행 6년 후 제조과정에서 유독물질을 41% 줄일 수 있었으며, 이 프로젝트를 이행한 기업주들은 1천 2백만 불의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2001년에 이르러서는 환경 중으로 배출되는 오염물질의 90% 이상을 줄이게 됨으로써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예 2) 캐나다에서는 70개 이상의 도시에서 농약사용을 철저히 규제하거나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다. 퀘벡주에서는 아이들이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농약사용을 금지하는 강력한 법을 시행하고 있다. 1990년 처음 이 법이 시행될 무렵, 잔디를 조성하는 회사로부터 반발이 있었지만, 퀘벡주 고등법원과 캐나다연방대법원은 잠재적인 환경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전예방의 원칙을 지킴으로써 이러한 조치들이 국가적으로 전파되는데 힘을 실어 주었다.
예 3) 캘리포니아주에서는 2005년 화장품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화장품 성분 중에 암을 유발하거나, 선천성 결손증(birth defects, 예를 들어, 태아의 구조적,기능적 문제점들)을 일으킬 수 있는 성분들을 기업들로 하여금 보고하도록 하였다. 결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20개의 화장품 제조사들은 이 법안을 지지하였으며, 200개 이상의 화장품 기업들이 안전한 화장품을 위한 협약(the Compact for Safe Cosmetics)에 서명하고, 3년 이내에 유해성분을 보다 안전한 성분으로 대체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외국에서는 왜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유해물질, 특히 발암물질은 다른 어떤 유해물질보다도 사전예방의 원칙이 강조된다. 노동현장에서 취급 또는 사용하는 발암물질은 공장의 굴뚝을 통해서, 오폐수를 통해서, 제품에 함유된 상태로 일반환경, 가정에까지 잠재적으로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발암물질을 원천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사회의 노동과정, 생산방식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위험은 노동자, 시민, 우리의 후손들이 시한폭탄처럼 떠안고 가는 것이다. 따라서 외국의 정책은 발암물질(또는 발암추정, 발암의심물질)들을 근본적으로 사용금지하거나 대체하는 사전예방의 원칙을 도입하고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노동자, 시민들이 요구하고, 개입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투쟁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시사해준다고 할 수 있다.
곽현석, 노동환경건강연구소